예상을 크게 빗나간 미국 47대 대통령 선거 결과, 우리는 무엇을 놓쳤나?

왼편의 카멀라 해리스와 오른편의 트럼프가 미국 국기를 배경으로 언쟁을 벌이고 있는 모습

미국 47대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주요 경합주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를 바탕으로 트럼프가 압승을 거뒀다. 어느 나라의 어떤 언론에서도 쉽사리 예상하기 힘든 결과였다. 독일, 영국, 프랑스 등 주요 유럽 국가의 언론들이 다소 달갑지 않은 논평을 내놓는 것과는 별개로, 이들에게도 일방의 "압승"일는 결과는 꽤 예상외였던 듯하다. 선거 직전까지 보도된 지지율이 거의 50:50이었으며, 카멀라 해리스가 다소 우위를 보이는 전국 단위 조사도 꽤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바다 건너 언론들은

도대체 무엇을 놓쳤던 것일까?


트럼프 지지자 일부가 자신의 정치적 성향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는 경향이나 진보 성향 미국 언론(CNN, 뉴욕타임즈, 워싱턴포스트 등) 보도에 과도하게 의존한 결과라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른 것을 지적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미국 대통령 선거를 논하고 예단함에 있어 바이든을 조망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오직 카멀라 해리스에만 집중했다. 누가 뭐래도 미국의 "현재"는 바이든이다. 그리고 선거는 현재를 평가하는 판단이다. 혹자는 미래를 기약하는 판단이라 주장하겠지만, 양 진영이 극단으로 대립하는 정치 상황에서 유권자에게 그런 넉넉함과 여유로움을 기대하긴 힘들 것이다.


현재에 치우친 판단이라 할지라도 이를 굳이 부정적으로 볼 필요는 없다. 유권자들이 현재의 삶과 상황에 만족하거나 불만족한 감정을 투표 용지에 투영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또한 현재의 상황을 기준으로 미래의 가능성을 추정하는 것도 합리적인 태도이다. 이에 현 정권이나 집권당에 대한 불만으로 야당에 표를 던지는 선거 양상은 어느 나라의 정치 현실에서든 동일하게 목격된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유권자의 권리가 정상적으로 보장되는 모든 선거가 사실상 그렇다.


"It's the economy, stupid."


1992년 빌 클린턴은 위의 메시지를 통해 경제적 불만을 자극하여 조지 부시를 꺾었다. 유권자들이 "현재"를 심판하는 투표를 한다는 사실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카멀라 해리스는 유권자의 시선을 "현재"로부터 떨어뜨려야 했기에 지나치게 미래 비전에 천착한 측면이 있다. 하지만 미래는 본질적으로 추상적이고 이상적이기에 유권자의 시선을 이끄는 데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그 미국의 "현재"란 것은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던 걸까? 우리의 시선이 놓친 바이든은 어떤 현재였을까? 뚜렷하게 경제 성장률에도 불구하고 계층별, 인종별 소득 격차는 오히려 심화되는 등 사회 통합에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책 수행에 있어 당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끌어내는 데도 실패했으며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전쟁에 대한 대응도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신통치 않은 대중국 정책, 이민자 정책 등 외교 사안은 그의 노쇠한 이미지를 급기야 조롱과 환멸로 치환하였다.


미국의 유권자는 미국의 현재를 살며, 미국의 현재에 그 시선을 고정한다. 하지만 바다 건너의 시선으로는 해당 국가의 현재를 체감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에 요란뻑적지근한 방향으로의 손쉬운 시선을 선택한 게 아닐까? 손쉬운 결정은 종종 방임이라 지탄받는다. 반론도 있겠으나 지지율이라는 숫자 놀음에 쉬이 놀아난(?) 결과를 놓고 볼 때, 언론의 안일함을 꼬집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렇게 미국인들의 선거는 우리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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